위대한 개츠비 서평..까지는 에바고 그냥 최종과제 에세이
그 학기동안 읽고 본 도리안 그레이, 오만과 편견, 데이지 밀러, 영화 Her 를 조금 섞어서 썼었던.
조 교수님은 잘 계실라나~
서양근대문학의 이해 최종 에세이
시시함, 사랑, 쓰레기, 진주, 그리고 세이렌의 노래
0. 시시함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웹툰 『송곳』에는 소위 명대사라 할 만한 문구가 자주 등장하는 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이거였다. “착하고 순수한 인간 말고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그냥 인간.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우는 거란 말이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을 이런 작품의 인용으로 하는 것은 다소 우습기는 하지만, 이 글귀는 어떤 이야기에나 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시한 존재니까. 어느 시대에나 영웅은 있고 대단한 사람들은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널리 퍼진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비겁하고 구질구질하고, 『송곳』에서 한 마디 더 인용해 오자면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그런 존재며, 완벽해 보였던 ‘영웅들’조차도 그런 구질구질한 면모 한둘쯤은 파 보면 나온다.(주석1) 그런 모습에 우리가 붙이는 수식어가 있다. ‘인간적’인 면모. 인간이라는 건 애초에 흔들림 속에 사는 시시한 것.
그런 의미에서 이 글에서는 『위대한 개츠비』를 중심적으로 다뤄보려고 한다. 사실 내 얘기가 개츠비 얘기보다 많을 수도 있다. 다른 책들도 재밌게 읽었고, 할 이야기는 많지만 개츠비만큼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는 않다. 그래도 글을 못 쓰는 김에 간단하게라도 이야기를 풀어 보자면, 『오만과 편견』의 경우 두 남녀의 ‘오만과 편견’이 주 소재이고 두 사람의 사랑이 결혼이라는 이상적인 결말로 끝맺어지다 보니 이런 비루함에 대한 글에서는 할 말이 딱히 많지 않을 것 같다. 다만 베넷 부부 이야기는 좀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데이지 밀러』에서는 사랑의 절정이 오지도 못했기에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 같다. 다만 저 데이지와 개츠비가, 너무나도 넘고 싶었던 어떤 ‘벽’, 세계의 경계에 대해서는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시빌 베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아, 이들의 사랑은 얼마나 시시한가.
Amor Vincit Omnia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사랑은 사람을 때로는 바보같이, 때로는 천재처럼 만들어 무엇이라도 해낼 수 있게 한다. 리지와 다아시는 캐서린으로 대변되는 계급 질서를 이겨내고, 바질은 자신 최대의 역작을 만들어내며, 도리안은 어린 여배우에게 모든 것을 내주듯 달려든다. 그 중의 으뜸은 제이 개츠비로, 이 아무것도 없던 1차 대전 참전 장교는 왕궁 같은 저택에서 매주 뉴욕의 명사와 어중이 떠중이들을 모아 파티를 벌이는 유명인이 된다. 사랑이라는 개념은 시간 속에서 언제나 변해왔지만, 그 위대함만은 언제나 칭송되어 왔다. 꼬마 신 에로스의 화살에 정신을 못 차리는 그리스의 신들부터 사랑만 믿고 모든 것을 던지는 현대 드라마의 주인공들까지. 누군가를 바꾸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사랑은 너무나도 쉽게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게 한다. 그 사람과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었던 길가는 너와 걸은 길이 되고 어딘가는 너와 처음 여행간 곳이 되고 어디는 1년, 어디는 무엇...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삶 속에 사랑이 의미를 부여하는 가장 강력한 것이 된다. 크리스마스, 발렌타인 데이 같은 날보다도 100일, 1주년이 더 의미 있는 이유는 다른 그 누구에게도 의미 없는 날짜가 오직 그 둘의 삶 속에서만 기념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 그런 의미 부여와 집착의 극한에 있는 남자가 있다. “개츠비가 그 집을 산 것은, 데이지가 바로 그 만 건너편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으니까요”(116) 5년 만에 다시 만날 그녀를 위해 산 집, 그 바다 너머의 초록 불빛은, 닉에게는 그저 532nm 파장의 가시광선이지만 개츠비에게는 천상의 계시이며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러나 거의 다 온 사랑의 목적지이며, 인생의 종점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그가 하는 일은 낭만적이다 못해 눈물겹도록 소박하다. 그저 매주 떠들썩한 파티를 열며, 이렇게 하고 있다 보면 그녀가 언젠가 와주지 않을까, 싶은 그런 소박한 광대 짓. 좋아하던 여자아이가 혹시 자기에게도 질문해 주지 않을까 싶어 시험기간에 모두의 질문을 밤중에 전화로라도 기꺼이 받아주고, 어쩌다 그녀가 물어보면 너무너무 기뻐서 답하는 사춘기 소년 같은.
사랑이 그를 미친 듯이 달려오게 했다. “매주 유익한 책이나 잡지를 한 권씩 읽을 것/매주 5달러 3달러씩 저축할 것/부모님 말씀을 잘 들을 것”(243) 같은 귀여운 소리를 하던 소년이, 월드시리즈를 조작한 암흑가의 대부와 손을 잡고 여기까지 오게 한, 사랑. 그 위대하고 강력한 것.
2. 검은 얼음(주석2)
산의 정상에 올라간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정답: 내려가는 것. 산이 아무리 좋다고 그곳에서 평생 살 수 있겠는가. 위대한 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풍광을 만끽한 등산가는 산을 내려가야만 한다. 사랑이 절정에 다다른 후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내리막길 뿐이다. 그런 것을 흔히 ‘서로에게 안정을 느끼고 장기적인 파트너쉽으로 나아가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불꽃같은 것에 전혀 뒤처지지 않습니다’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다들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절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최소한 서울대생은 이런 얄팍한 거짓말에 속으면 안 된다. 중년의 등산객들이 관악산에서 막걸리 한 잔 하고 내려와 서울대입구의 술집과 모텔을 드나드는 것을, 이 학교의 학생이라면 대체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평균수명 40세 시대의 고안품인 일부일처 결혼 제도가, 심지어 그 시대에도 딱히 잘 작동하지도 않았는데 평균수명 80년 시대에도 유효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을 지나치게 시시하지 않은 존재로 보는 오판이다. 그런 사랑은 소설에나 나온다. 소설에서조차도! 톰의 머틀, 데이지의 개츠비, 우리 위컴, 도리안 그레이, 헨리 워튼의 부인까지, 어째 차게 식는 사람이 아닌 사람보다 많은 것 같다. Amor Vincit Omnia! 그렇지만 게임에서도 무적은 제한시간이 있다. 천하무적의 사랑은 한 때 뿐이다. 이제는 그냥 상대 안 하고 웃어 넘기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버린 베넷 씨 조차도 그 무식하고 천박한 아내를, 그리도 열렬히 바란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모두가 사랑하던 데이지를 가진 톰은!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의 평은 미묘한 편이지만, 그 누구도 톰 뷰캐넌 캐스팅에 대해서는 완벽하다는 말 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미국 마초의 화신 같은 톰이 눈물을 뚝뚝 흘린다.(200) 지금 정부의 죽음에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그는 고작 몇 시간 전 개츠비와 함께 데이지의 소유권을 놓고 정말 보는 사람이 괴로운 결투를 벌였다.(185-192) “당신 신발을 적시지 않으려고 펀치볼에서 당신을 안고 내려왔던 그날도 말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쉰 듯하면서도 상냥한 여운이 감돌았다. “.......데이지?”(188) 이런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너무 너무 좋아했었던 사람이 있었다. 한 시간 반이 걸리고 대중교통을 3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남의 학교로 수업을 빼먹어가며 가는 길에 아쉬운 점은 그저 그 걸리는 시간 때문에 볼 시간이 적어진다는 것뿐이었다. 스무 살 여름 그 사람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나한테 ‘ㅠㅠ’하면서 카톡을 보냈을 때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다가 문자 그대로 폴짝폴짝 뛰었었다. 내게 그 사람은 첫눈 같아서, 고등학교 1학년 처음 보았던 그 순간부터 문자 그대로 천 번은 보았고 주고받은 문자는 몇 만 통에 달하며 스무 살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면서 일주일에 5~6일은 그 사람이랑 카톡만 하고 살았지만 그럼에 불구하고 언제나 설레고 새로운,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지금도 그런 사람이라면 대학 과제의 땔감 따위가 되고 있을 리가 있겠는가. 보고 또 보아 딱히 새로울 것 없는 걸 알면서도 첫눈은 늘 사람을 설레고 가슴 뛰게 하는 그런 힘이 있다. 그 사람도 그랬다. 그러나 그 예쁜 첫눈도 결국 땅에 닿으면 녹아내려 길 위를 흐르는 검은 얼음이 되어 질척거릴 뿐이다.
슬프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애초에 사랑 자체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음을. 개츠비는 말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172) 개츠비도 깨달아 버린 것이리라. 사실 자신이 그렇게나 열심히 쫓아 온 이 초록의 불은, 그럴 가치가 없었다는 것. “You're worth the whole damn bunch put together.” 닉의 외침.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것은, 위대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 사랑을 쫓아 온 그의 삶의 방향은 위대했지만, 데이지, 톰, 조던, 그 외 수많은 동부의 이 damn bunch들은, 그리고 개츠비 본인 역시 위대하지 않다. 누가 봐도 똑똑하고 교양 있는 인물인 베넷 씨의 베넷 부인에 대한 마음이라는 게 결국은 그냥 결혼 직전 외모에 홀린 것뿐이었음에서, 그 지성과 교양을 물려받은 딸 리지가 위컴에게 홀려 다아시를 열심히 욕하다가 위컴이 부잣집 딸 홀리는 이야기를 듣고는 ‘따...딱히 좋아했다던가 하는 건 아니야!’류의 반응을 보이는 데에서, 윈터본의 죠바넬리와 데이지를 보는 모습들에서, 시빌 베인이 자신이 생각한 예술의 현신에서 벗어났다고 이내 불같이 화를 내고 그녀를 헌신짝 취급하는 도리안 그레이에게서 사랑이라는 것의 시시한 덧없음을 발견한다. 사실 사랑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정말 그 사람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대부분이란 말도 과분하다. 인간이라는 시시한 것에 그런 하늘의 도리라도 깃든 것처럼 구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개츠비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애초에 그가 데이지에게 반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사랑이라는 것이, 데이지에 대한 마음이라는 것이 황금에 둘러싸인 세계를 동경하던 청년이 그런 ‘고귀한’ 세계의 여자를 처음(209)으로 보았기에 생긴 것이지, 데이지가 진정 고귀하고 위대한, 이토록 사랑받아 마땅한 인간이기 때문이겠는가? 애초에 그의 여성편력은 뒤틀려 있었고(143) 결정적이었던 것은 데이지가 그가 처음으로 본 ‘그 세계’에 있던 여자였다는 사실과 그 데이지를, 그가 온갖 거짓으로 스스로를 치장해 품에 안아봤다는 사실 뿐, 사실 데이지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그의 사랑은 제임스 개츠가 아닌 제이 개츠비가 되어 황금의 세계에 편입하고자 했던 그의 욕망의 뒤틀린 자식이며, 데이지는 그 세계의 상징이자 열쇠였을 뿐이다. 그 날 본 첫 여자가 데이지가 아니었더라도 적당히 예쁘기만 했다면 그는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을 것이고, 데이지를 결국 안지 못했다면 역시 데이지는 그냥 추억 하나 정도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손에 쥐어보았기에 그는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가 없다.
빈 물통은 물을 붓든 콜라를 붓든 뭔가를 부으면 다 채워지지만, 사람의 마음에는 아무리 다른 것을 채워 넣어도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제이 개츠비에게는 데이지의 자리가 그렇다.
그녀를 통해서 꿈만 꾸던 황금의 세계를 맛보았다. 그녀를 위해서 온갖 거짓말을 했다. 저 황금의 세계가 그녀를 다시 빼앗아갔다. 왜냐하면 그는 황금의 세계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츠비가 그 세계에 입성하고 싶다면, 그는 당당하게 데이지를 차지해야만 한다. 그렇게 오롯이 ‘시간을 돌려’ 그때의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어야만, 그는 진정으로 제임스 개츠가 아닌 제이 개츠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면 역설이 등장한다. 이쯤 되면 그깟 데이지가 뭐가 중요하고 데이지에 대한 사랑이 뭐가 중요한 것인가. 결국 의미 있는 것은 제임스 개츠의 망령을 완전히 져버리고, 제이 개츠비가 되는 것뿐이고, 그 방법이 그녀와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토록 시시한 사랑. 앞에서는 인간의 사랑에 필연적인 이치라도 깃든 것처럼 굴지 말라고 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이런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사랑은 오히려 이유 없는 사랑보다 더더욱 시시한 것이 된다. 당연하다. 필연적인 이유라고 해 봐야 시시한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스스로가 가장 큰 이유가 되는 대신 그런 시시한 이유에 부차적으로 딸려 오는 것이 어떻게 위대하고 대단한 것이 되겠는가. 사랑은 중부 소년을 암흑가와 손잡은 거물로 만들 만큼 위대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시시하다.
3. 진주
사람의 가슴속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가장 소중한 물건이란 이렇게 시시한일일까? 만일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본다면 하찮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게 진주(眞珠)라는 데 문제는 있다. 거기를 건드리면 언제나 울리고 아프다. (최인훈, "회색인", 문학과지성사, 1961(1994)년, 82-83면.)
그렇지만서도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그런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만다. 진주라는 비유는 너무 탁월하다. 조개의 껍데기 안에 이물질이 들어온다. 그러면 조개가 그것을 품고 품고 또 품어 스스로의 침전물을 잔뜩 쌓아 보석의 구슬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소한, 별 것 아닌 일을 이 가슴에 품어 추억과 망상과 눈물로 뒤덮어 빚어낸 보석. 그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 된다. 하지만 조가비가 품은 진주는 누구의 눈에나 아름다운 보석이지만, 인간의 마음에 품은 것은 그 사람에게만 보석이다. 조개의 탄산칼슘은 눈에 보이지만 사람이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타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마음의 보석이 아닌 그 가운데에 박힌 티끌뿐이다. 나에게는 너무나도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이라 모두 앞에서 신나게 이야기하지만 친구들은 사실 이미 다 까먹어버린 그런 이야기 같은. 그래서 그 사실을 느껴버릴 때에는 언제나 아프다. 이 진주에 금이 간다. 이 마음에.
개츠비에게 데이지와 함께 한 한달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진주다. 저 시시하기 짝이 없는, 위태위태한 거짓말 위에 선 티끌같은 사랑이 그의 마음에 들어오자, 그는 그 한 달을 마음 속에서 품고 품고 또 품어 그녀를 모시기 위한 신전을 짓는 데에 스스로의 젊음과 양심과 모든 것을 팔아 넘겼다. 데이지와의 끝나버린 사랑을 혼자서 품고 또 품어 혼자서만 결혼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마음을 키워갔다. 그리고 그 진주 덕분에 그는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사랑의 위대함, 절정이 지난 후였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 불같은 마음을 박제해냈고, 오히려 더욱 더 키워나간다. 첫 재회 때의 그 바보 같은 모습은 그야말로 사춘기 청소년이나 보일 법한, 그 사랑이 여전히 절정에서 불타오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그렇지만, 데이지에게는? 물론 데이지도 그를 사랑했었다. 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두고 다시 황혼의 세계로 돌아가(213) 데이트를 하고, 새롭게 등장한 톰 뷰캐넌의 품에 안길, 딱 그 정도만. 물론 그보다는 더 사랑했을 수도 있다. 결혼식을 앞두고 그런 난동을 부리고, 그 유명한 셔츠 장면에서 눈물을 보이고, 재회하자마자 이내 열렬히 바람을 피우는 것을 보면 그녀에게도 개츠비는 진주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딱 그 정도뿐, ‘너와 있던 시간은 나에게도 아름다운 기억이었어’정도일 뿐. 그녀는 개츠비를 선택할 마음은 없다. 그리하여 제이와 톰의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결투 후 그녀는 결국 톰에게 돌아간다. 본의든 아니든 머틀의 죽음을 개츠비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개츠비가 그토록 기다리던 전화 한 통 없이. 이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게 개츠비의 사랑은 과분해 보인다. 그런데 그 사랑도 딱히 대단한 것은 아니다. 시시한 것과 시시한 것이 부딪히는 걸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복잡 미묘한 그런 기분. 하지만 그가 품어낸 진주의 크기만큼은 대단하다 할 수 있다. 그래, 『위대한 개츠비』니까. 데이지는 이야기가 끝난 후에도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개츠비라는 티끌은 데이지에게 무엇이었을까? 이런 자신만의 진주를 부둥켜안고 평생을 살아간 개츠비가, 그 진주가 깨져버렸을 때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여름 내내 쓰지도 않았던 풀장에 누워 맛보았을 그런 비참함이란 것은 대체. 데이지가 아니면 채울 수 없던 마음의 빈 공간에, 더욱더 크게 뚫려 버린 진주가 있던 자리.
4. 세이렌의 노래
그래서 결론은 무엇인가. 이 아름답고 아린 진주 같은 것을 어찌 해야한다는 말인가. 슬프게도, 결론은 딱히 없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에 대한 확신, 나쁘게 말하면 독선이고 좋게 말하면 주체적인, 그런 에너지가 있었다. 나이를 먹으며 매사에 어떤 말을 하는 것이, 단정짓는 것이 스스로 우습게 느껴질 때가 많아 무언가에 판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그럴 때는 80년대 사람들은 오히려 조금 부럽다고도 생각했다. 지탄받아 마땅한 거악이 코앞에 있어 정의감을 매일매일 충전하고 해소할 수 있고, 3S 정책의 일환으로 넓게 열린 대학문을 통과하면 대충 놀고 시위하며 요즘 세상이라면 중소기업 경리도 못할 스펙으로 대기업 문턱을 때려 부수고 들어가던, 여유가 있는 꿈같은 낭만의 시대. 낭만이라는 건 저런 데에서 나온다. 주인공 한쪽이 가난한 사랑 소설은 있어도 두 사람 모두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난한 연애 소설 같은 걸 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불행하게 끝날 것이다. 낭만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어야 나온다. 두들겨 패면 세상이 나아질 것만 같은 거악도 있으면 더 좋고.
그러나 사회는 이제 복잡할 대로 꼬여 선악보다는 이해의 구도가 대부분의 경우에 들어맞고 낭만이라는 건 어디서도 찾아보기도 힘들다. 이런 세상에서, 무언가에 대해 옳다, 그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물론 이 와중에 정말 뜬금없이 사회적 거악이라는 게 부활해 이 얄팍한 정의감을 토요일 저녁을 바치는 정도로 채워주고는 있지만, 한번 잃어버린 자신감은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주석5) 요즘은 무언가에 대한 가치평가를 해야 할 때 이런 생각을 한다. 200년 전만 해도 사람 위에 사람 없다는 말은 질 나쁜 농담이었고, 100년 전만 해도 동성애자는 사형이었다. 내가 지금의 도덕과 사상으로 무언가를 옳고 그르다고 판단했을 때, 200년 쯤 후 사람이 본다면 얼마나 편협하고 얄팍해 보일까. 이렇게 일신일신 우일신으로 우유부단해지는 걸 보니 10년 쯤 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관대한 사람이 되고 말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랑’이라는 구질구질하고 시시한 것에 대한 평가는 함부로 내리기 힘들다. 흔히들 하는 말을 한번 보자. 아름다운 추억? 나는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말을 도무지 모르겠다. 다시 돌아올 거라는 기약 없는 과거의 행복은 불행한 현재의 빛바랜 거울이 되어 현재를 끊임없이 조롱하고 괴롭혀 사람을 끊임없이 침전하게 만드는 닻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것을 폄하하고 미워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앞서 말하였듯이, 그것은 진주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라는 괴물이 키워낸, 내 눈에만 진주인 진주. 그래서 이 진주로 치장된 닻은 사람을 더 깊게, 깊게 끌어내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254) 의도한 언어유희인지는 모르겠지만 Current가 우리를 과거로 떠밀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이란 구절은 묘하게 씁쓸하다. 현재는 사람을 과거로 떠밀고, 그럼에 불구하고 나아가야 하는 것. 개츠비는 힘차게 나아갔다. 그리고 나아가지 못했다. 보잘 것 없는 중부 농부의 아들이,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린 허세와 그 덕에 얻은 작고 너무나도 귀여운 쓰레기 진주. 그 진주를 동력 삼아 개츠비는 현재라는 조류를 거슬러 그 초록 불빛을 만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기관리가 철저한 인물(243)이었지만, 데이지라는 진주(주석3) 없이도 여기까지 나아갈 수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암흑가를 통과해 마침내 찾아낸 등대의 초록불. 그러나 자신의 진주가 사실은 하찮은 부스러기라는 사실은, 그 사랑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음은 그를 너무나도 잔인하게 밀쳐낸다. 故人,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옛 사람. 이런 너무나도 잔혹한 현재에 쓸려 개츠비는 과거의 인물로 나자빠지고 마는 것이다. 시시한 사랑이 그가 current를 거슬러 미래를 향하게 한 야망의 원동력이 되었고 시시한 사랑이 그를 침몰시켰다. 이것을 대체 무어라고 해야 하는가.
이럴 때 쓸 만한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빛날 최고의 문인이 직접 쓴 글귀다. “그것보다 이 글을 맺으면서 무슨 결론 비슷한 말을 해야겠는데 무슨 말을 할까. 별로 신통한 말이 없다. 신통한 행동 하나 없는 삶이니 당연하다.”(주석4) 최인훈도 이러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지나간 사랑. 더 이상 낄 일 없는 커플링, 차마 버리지는 못하는 편지, 이런 예쁘고 아린 것뿐만 아니라 스탬프 한 개 남은 모텔 쿠폰, 방 안 아무데나 굴러다니는 반쯤 빈 러브젤, 그런 것들이 함께 부르는, 세이렌의 노래.
주석1) 말년의 소녀들과의 이야기는 제쳐두더라도 아내가 아플 때는 서양의학을 못 쓰게 해서 죽게 만들더니 본인은 아프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간 마하트마 간디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신의 은총 운운하며 열악한 의료를 받게 방치해둔 테레사 수녀라든가, 뭐 그런 이야기는 많지 않은가.
주석2) 눈 온 후 아스팔트에 줄줄 흐르는, 영어로는 black ice라고 하는 그거. 한국어 명칭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주석3) 물론 꼭 데이지여야만 했을 이유도 전혀 없지만.
주석4) 최인훈, 「공명」, 문학과 이데올로기, 개정판, 문학과지성사, 1979(2009)년, 143면.
주석5) 옮겨적는 김에 다시 읽어보니 결국 이 조차도 돌이켜보면 이해관계에 불과했던 거야. 문재인 개-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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