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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뺏고, 밟고, 퍼내도 아깝지 않을 그런 것이, 에이 여보쇼, 어딨단 말씀이오?” “있지요.” “뭡니까?” “사랑과 시간.” 나는 경악하여 넉넉히 십 분 남짓을 망연자실한 끝에 모기 소리만하게 대꾸한 것이다. “여자여, 그대의 언(言)이 미(美)하도다.”
김동인한테서는 역사 감각이란걸 조 금도 찾아볼 수 없어. 그가 역사 소설을 썼다는 것이 그 증거야. 그에게는 이야기로 들은 역사, 이미 화석이 된 역사밖에는 파악할 수 없었던 모양이지. 그의 현대 소설에는 날짜 표시가 없어. 그 인물들 은 이조 시대라도 좋고 일제 시대라도 좋고 오늘이라도 좋은 사람들 아닌가? 그의 소설은 역사의 비 명(碑銘)이 아니라 자연의 가락이야. 바람과 물 같은 것이야. 「발가락이 닮았다」는 단편 있잖아. 그 래 발가락이 닮았으면 어쨌다는 거야? 삼천리 강산이 다 일본을 닮아 가는 판에, 발가락쯤 닮아서 무에 그리 신기한 게 있겠어? 역사를 자연과 헷갈리고 인간을 씨돼지와 혼동하고 있는 게 아닌가? 김동인은 일본의 침략을 독감 같은 걸로 알았던 모양이야. 그에 비하면 이광수는 훌륭해. 다른 작품 은 다 말고 「흙」하나만 가지고도 그는 한국 최대의 작가야. 그 시대를 산 가장 전형적 한국 인텔 리의 한 사람을 무리 없이 그리고 있잖아? ‘살여울’에서 한 그의 사업이 성공했느냐 못 했느냐는 물 을 바가 아니지. 그는 그 당시 국내에서 살았던 낭만적인 인간의 꿈을 그린 거야. 그는 시대의 큰 줄 기가 무엇인지를 보는 눈이 있었어.
그러나 자네가 말한 한국 문학의 문제도 역시 한국적 상황 일반의 부분적인 형태라는 게 내 생각이야. 한국의 문학에는 신화(神話)가 없어. 한국의 정치처럼 말야. ‘비너스’란 낱 말에서 서양 시인과 서양 독자가 주고받는 풍부한 내포와 외연(外延)이 우리에게는 존재치 않는단 말이거든. 서양의 빛나는 시어(詩語)나 관용어들이 우리의 대중 속에서 매춘부로 전락하는 사례를 얼 마든지 들 수 있어. 가로되 ‘니콜라이의 종소리’ ‘성모 마리아’ ‘슬픔의 장미’ ‘낙타와 신기루’ ‘아라비 아’ 같은 거. 이런 말은 그쪽에서는 강렬한 점화력을 가진 말이야. 왜냐하면 그 말들 뒤에 역사가 있 기 때문이야. ‘니콜라이의 종’하면 희랍 정교회의 역사와 비잔틴과 러시아 교회와 동로마 제국의 흥 망이 그 밑에 깔려 있는 게 아니겠나? ‘성모 마리아’는 더 말해서 뭣해? 바이블과 카톨릭 중세 기사 들의 순례와 수억의 인간이 긋는 성호(聖號)가 이 고유명사를 받치고 있지 않아? 탄식의 장미는? 장 미꽃을 빼고서 서양 문학을 말하는 건 달을 빼고 이태백이를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사막’ ‘낙타’ ‘아라비아’ 같은 것도 마찬가지야. 유럽의 모험과 통상(通商)의 역사를 빼고 이런 이미지를 이해할 수 는 없을 거야. 그것은 아라비안 나이트와 아라비아의 로렌스와의 이상한 혼합물이야. 주민과 풍토에 서 떨어진 신화는 다만 철학일 뿐 신화는 아니야. 신화는 인간과 풍토가, 시간과 공간이 빚어 낸 영 혼의 성감대(性感帶)지. 거기를 건드리면 울고 웃고 발정하고 손톱을 박아오는 그러한 지역이거든. 이 성감대가 없고 보면 애무는 부자연한 장난이며 실례이며 변태에 지나지 않고, 독자는 불감증의 게으른 잠에서 깨지 못해. 한국의 현대시와 그 독자는 서툰 부부와 같아. 그렇다고 우리는 돌아갈 만 한 전통도 없다. 아니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전통은 자칫 우리들의 헤어날 수 없는 함정이기 십상 이다. 흥얼거리는 타령조와 질탕한 설움 속에 너울너울 춤추는 선인들의 미학은 불쌍한 우리들 개화 손(開化孫)들의, 그나마 탐탁지 못한 얼을 빼고 골을 훑어서 급기야 하이칼라 머리를 몽똥그려 상투 를 꼬아 줄 테니까. 우리들에게 있어서 서양은 매춘부와 같고 선인들은 물귀신 같애. 귀신이래서 나 쁜 것은 아니지. 다만 사이렌과 발푸르기스의 마녀들의 후손은 달을 포격하기에 이르렀으나 손오공 의 후예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문제가 아닌가? 하늘을 나는 모포와 사이렌의 피리는 살아 있다. 그러나 손오공의 여의봉은 어디 있는가? 그들의 경우 과거와 현재는 이어져 있으나 우리는 끊 어져 있다. 전위(前衛), 보수(保守)란 말은 우리들의 경우 이중의 뜻을 가지고 있어. 우리들에게도 전 위란 여전히 서양적인 것일 수밖에 없지만, 정작 그 상대는 보수적 서양과 동양이라는 두 겹의 얼굴 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저들은 단단한 벽돌 위에 얹힌 풍차와 싸우고 있으나 우리는 허공중에 거꾸 로 매달린 허깨비와 싸우고 있어. 우리는 돈키호테도 될 수 없어. 저들은 낡은 신화를 부수고 새 신 화를 세우기 위해 시를 쓰지만, 우리에게는 부술 신화가 없고, 서양의 그것은 서양 시인들이 부술 것 이며 동양의 그것은 이미 폐허가 돼버렸으니 부수려야 부술 수 없어. 우리들은 패배한 종족이야. 상 황은 뚜렷해. 우리들은 몇백 년 혹은 몇십 년씩 식민지민(植民地民)이었어. 동양은 백인들의 노예로 서 세계사에 끌려 나왔어. 맞먹는 경기자로서가 아니야. 이 사실이 모든 것을 설명해. 피카소에게는 필연적인 일이 우리에게는 필연적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은 이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봐. 에어플 레인을 날틀이라고 말해 본대서 무에 달라지겠는가 말이야. 비행기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손이 비행기를 만들고 우리들의 몸이 비행기의 떨림에 더 많이 친근해지는 때에만 가능해. 문제는 말의 영역이 아니라 역사의 공간에 있지. 언어로 친다면 우리도 과히 빠지지 않아. 지난날 우리에게 언어는 즉 존재였지. 언어 그것이 목적이었지. 그러나 서양인들에게는 그것은 부호였어. 그것은 작업 을 위한 눈금이며 수획의 기록이었다는 거야. 서예(書藝)라는 예술이 이 같은 차이를 잘 말해 준다고 볼 수 있어. 언어가 부호이기를 그치고 존재로 승격했을 때 우리는 존재를 잃었지. 그래서 가장 풍부 한 언어인 한자(漢字)는 가장 가난한 언어가 되었고 가장 소박한 표음문자는 그 속에 풍부한 역사의 육신을 가지게 되었어. 신화의 부재란, 사실은 역사의 부재였던 것이야. 언어는 생산하지 않아. 다만 역사, 행동만이 생산해. 언어는 그 생산고(生産高)를 기록할 뿐.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an Age)라 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결코 기계적인 실러블의 배합의 결과가 아니라 구체적인 문화사적 부호인 거야.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아니라도 좋아. 가령 불독(Bulldog)이라도 좋아. 그렇더라도 그 시대가 동 일한 것인 이상 우리는 불독 시대(Bulldog Age)에서 엘리자베스 시대와 동일한 심상(心象)을 받을 게 아닌가? 부잣집 딸이 설사 ‘천둥이’라는 이름을 가졌대도 거기서 따뜻한 유머와 화려한 익살을 볼 테지. 그러나 심봉사의 딸인 한, 그녀가 선화공주란 이름을 가졌대도 별수없어. 거리에 나앉은 성명 철학자들을 찾는 것이 부질없는 건 이런 때문이야. 이렇게 말하면 시의 창조적 기능이나 예언으로서 의 기능을 잊었다고 할 테지만 창조나 예언도 인간에 관한 한 운명에 대한 모험이란 뜻일 테고, 운 명에 대한 모험이란 어차피 역사에 대한 ‘반격 형식’이 아닌가? 우리가 무리했던 것은 우리들의 ‘현 재’에 통과시킴이 없이 엉뚱하게 파리에 혹은 서라벌에 비약한 데 있지 않겠는가 말이야. 파리도 서 라벌도 우리에겐 이방(異邦)이야. 이제까지 우리는 오해하고 있었어. 이 같은 현상이 왜 문학에 한한 일이겠어? 이건 한국의 상황 일반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문학 자체에만 책임을 묻는 건 너무 가혹 하다는 거야.”
“그것도 역시 거짓말이야. 혁명이 가능했던 시대라는 건 어디도 없었어. 그래서 혁명이 일어났던 거 야. 이런 역설의 논리는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만 뚫렸어. 그 의지의 발동을 망설이는 것을 나는 비겁이라고 부르는 수밖에는 없어.”“아마 그럴 거야.”준의 말투는 화난 듯했다. 학은 친구를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방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휘청 했다. 왜? 하고 준이 눈으로 물었다.“가겠어”“비가 오잖아. 자고 가.”“아니, 오늘은 가봐야 돼.”“그래?”준은 더 말리지 않고 친구를 따라 방을 나갔다. 바깥은 안에서 낙숫물 소리로 짐작한 푼수로는 덜한 비였다. 안개보다 조금 무거운, 그러나 몹시 차가운 가을비였다.“정말 가겠어?”준은 손바닥을 펴서 비를 받는 시늉을 하면서 다시 한번 물었으나 학은 곧장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대문을 나서기 전에 학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자네 말이 맞는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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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구불구불한 잡담을 다 제하고 간단히 말한다면 그는 외로웠기 때문에 별하늘을 사랑하게 되었고 뒤늦게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졌다는 말이 되겠지만, 간단한 일을 간단히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그 나이의 병일진대 그런 호걸스런 충고는 독고준에게 아무 쓸모도 없다.
사람의 가슴속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가장 소중한 물건이란 이렇게 시시한 일일까? 만일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본다면 하찮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게 진주(眞珠)라 는 데 문제는 있다. 거기를 건드리면 언제나 울리고 아프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올라구. 우리는 이렇게 사는 것이다. 다른 누가 와서 또 한번 겁탈하는 것을 기 다리는 실성한 갈보처럼 우리 엽전은 언제까지고 임을 기다릴 것이다. 사랑과 시간. 엽전 의 종교. 하하. 속으로는 번연히 괘가 그른 줄 다 알면서 얼렁뚱땅 거짓말이나 해가면서 처자식 고생이나 시키지 않게 처신하는 유식한 분들이 정치를 하고 사업을 하고 신문을 내 고 교육을 하는 판에, 백년하청이지 어느 날에 물이 맑아질까. 그러니까 혁명이라? 싫다. 누가 이 따위 엽전들을 위해서 혁명을 해줄까 보냐. 아까운 목숨을 걸자면 좀더 귀여운 사 람들을 택해야지. 독고준 자네는 엽전 아닌가. 그러니까 엽전답게 목숨을 아낀단 말이다. 나는 더러운 고슴도치처럼 혼자만 웅크리고 살다가 나만큼 비열하고 그저 그만한 여자가 있으면 같이 살아도 좋고. 그러니까 김학 선생. 나는 당신이 좋으면서 싫어. 당신은 내 생 활을 어지럽히니까. 되지도 않을 일로 슬픈 환상을 일으켜 주니까. 김학 선생, 당신의 순정 은 잘 알아. 그러나 난 엽전의 생리를 잘 알아. 내가 엽전이니까. 안 될 거야. 잘 안 될 거 야. 실은 그게 아니야. 서양 아이들 등쌀에 제대로 되겠어? 그 애들의 거창한 힘과 겨룰 수 없어, 김학. 엽전답게 살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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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한은 풀어야 하고, 욕망은 이루어져야 해. 정치적인 강간의 상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 국민은 정치적으로 불감증이 돼. 정치에서 어두운 면만 보고 외면해 버려. 그저 몸으로만 당할 뿐 감 격을 모르고 산다는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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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통에서장미꽃은피지 않는다그러나강간속에서는민주주의가핀다그리고진흙에서연화는핀다
그 중에서 그는 고무줄로 묶어 놓은 대학 노 트 꾸러미를 꺼냈다. 일기장과 비망록이다. 그는 가끔 그것을 꺼내 읽는다. 이런 일이 있었 던가 싶은 사건을 발견할 때도 있다. 어떤 구절에서는 쓴웃음을 짓는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생활의 기록이다. 그는 끌리는 대로 한 권에서 몇 군데씩 띄엄띄엄 읽어 갔다.
그런 놈이 버젓하게 살아 있기 때문에 이 사회는 이 꼴이다. 그런 사람을 버려 두기 때문 에 드라마는 없는 것이다. 사람을 속인 인간. 자기를 가장 믿는 인간을 밟은 녀석은 사람 이 아니다. 김학이 모양으로 국가 민족을 상대로 흥분하도록 내 영혼은 고상하지 못하다. 내게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상처를 입었을 때 내 신경은 곤두선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렇게 한다면 정의는 가장 확실히 행해질 이치가 아닌가. 죽이자는 것도 아니다. 그를 협박 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인생이란 장미꽃 가시 하나에 의해서도 파괴된다는 것, 손바닥만한 종이 한장 때문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자. 그리고 그에게서 돈을 착취하자. 꿈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제일 중한 물건은 돈일 테니까.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아픔일 테 니까. 심장이 돌처럼 굳어진 사람을 울리자면 돈을 뺏는 수밖에 없다. 학비 정도가 아니고 많이 뺏자. 착실한 학생을 몇 명 골라서 학비를 대주는 것도 좋다. 우선 납부금 낼 때마다 찔끔거리는 주인집 영숙이를 공부시킨다.
혼자라는 생각이 이상한 감동을 주었다. 혼자 다. 가족이 없는 나는 자유다. 신은 죽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다, 라고 예민한 서양의 선각자들은 느꼈다. 그들에게는 그 말이 옳다. 우리는 이렇다. 가족이 없다, 그러므로 자유 다. 이것이 우리들의 근대 선언이다. 우리들의 신은 구약(舊約)과 신약 속에가 아니고 족보 속에 있어왔다. 우리들의 우상은 십자가에 박혀 스스로 죄를 짊어진 한 인간이 아니고, 항 렬과 돌림자로 새겨진 족보였다. 그런 까닭에 우리들의 신은 ‘집안’이요 ‘가문’이었다.
김유정-어린날 그 여자가 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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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셔널리즘
요코하마 폭격이 미치광이 광대가 된 것 - 집단이 이제는 무기물
"뭐, 행복한 사람들은 곧 잊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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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는 아직도 2․4파동의 뒷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민주주 의의 조종(弔鍾). 독재의 횡포. 다수당 횡포. 빈사(瀕死)의 국민 주권. 그런 말들이 눈에 들 어왔다. 다수당(多數黨)의 횡포. 얼마나 우스운 말인가.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가 아닌가. 다수결로 통과되었으면 그것은 합법인 것이다. 그 다수당을 만들어 준 것은 국민이 아닌 가. 그런데 그 국민은 다수당을 지긋지긋한 악당들로 보고 있고. 이 순환. 이 순환의 형식 면만 본다면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수당이 만들어진 구체적인 과정에 부정이 있는 것이 다. 민주 국가에서 다스리는 원천(源泉)인 투표가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나쁜 놈들이 다수당이 되고 마는 현실.
어떤 사람이든 자기의 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등록이 된 신인가 아닌가에 차이는 있을망정, 그 사람의 얼을 가장 확실하게 움직이는 힘을 가지는 한에서 그것은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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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는 들고일어난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 그것 이 없이는 들고일어난 다음에도 수습할 길이 없어. 그게 무언가? 새 세력이야. 현 집권자 들을 가령 몰아낸 다음 에 정치를 맡을 수 있는 사람들 말이야. 어느 혁명이든 이런 새로 운 전위대를 가지고 있었어. 크롬웰 의 청교도라든지, 불란서 혁명의 계몽주의자들이라든 지, 러시아 혁명의 볼셰비키라든지, 일본 유신의 왕당파라든지, 하는 광범한 사회층을 기다 려서 비로소 가능했어. 그리고 이 사람들은 당시의 낡은 질 서를 반박할 수 있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어. 즉 혁명은 사상과 엘리트와 대중의 삼중주라고 할 수 있어. 이 셋 가운데 어느 하나가 빠져도 혁명은 성공하기 어려워. 그러면 오늘날 한국에서 새로운 사 상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지금 눈앞에 보는 현실이 이 사회에서 공인(公認)된 사상의 악에서 나오 는 걸까? 그건 아니야. 민주주의가 어디서 발생했건 이건 훌륭한 사상이야.
우리 민족도 그 성화(聖火)를 면면히 계승해 오다가 동학에 이 르러 그만 놓쳐 버렸어. 그러자 나라는 망했어. 오늘까지 이 꼴이야. 우리는 지금 황량하기 그지없는, 신의 사막에서 기술 교과서만 뒤지고 있어. 이 사막을 가로질러 오 아시스로 가 기 위해서는, 신의 약속과 사랑을 믿는다는 일이 절대 필요해. 우리 현실이 사막처럼 막 막하면 할수록 그래. 그런데 우리들의 신들은 저 석굴암에서 관광 손님 상대로 무료한 세 월을 보내 거나, 조상 제삿날에 가끔가끔 다녀가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기독교에서의 개인(個人)은 완전히 수학적인 동질성(同質性)을 가지고 있어. 이것은 신(神) 의 시점(視點) 위주기 때문에 그래. .... 그러나, 공을 깨닫는다 하더 라도, 현실의 인간이 서는 자리는 그래도 인간인 것이지 신은 아니야. 사람이 깨닫는다는 것은 비인(非人)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인(眞人)이 되는 것이야. 마치 석가모니가 법을 알 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현신(現身)한 것처럼, 깨달은 사람도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인 간 세상에 머무는 길밖에는 없어. 불경에 보면, 보살은 중생을 건지기 위해서 스스로의 성 불을 미루었다고 했어. 보살도 인연에 매여 있는 거야. 사랑은 이렇게 구체적인 거야. 불교 가 가르치는 사랑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지, 추상 적인 남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야. 이것은 사해 동포의 이상에 조금치도 어긋나지 않아. 왜냐하면 사해 동포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결국 바로 곁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해 가는 길밖 에는 없지 않나. 불교의 사랑은 이렇게 실천적이고 구체적이야. 서양의 어떤 소설가가, 자 기는 인류는 사랑할 수 있으나 고약한 바로 이웃은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의 이야기를 쓴 걸 본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게 바로 기독교의 그와 같은 허(虛), 추상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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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유학이란 게 선진국의 학술과 생활을 배우러 가는 것이라면, 이제 말한 것처럼 학문 쪽은 우 리 같은 과에서는 유학이 무의미하고, 다른 한 가지, 즉 생활을 견문한다는 의미 에서라면 더욱 필요 없는 일이지요. 우린 지금 민족 전체가 유학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보 는 것, 듣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미국 문화 아니에요? 앉아서 경험하는데 뭣 하러 돈 쓰고 갑니까?
가령 여기 국내 문단의 모더니즘이 있습 니다. 무책임한 에피고넨(아 류)들. 문화적 문맥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르고 덮어놓고 베껴 낸단 말 씀예요. 자기들도 모르는 헛소리를. 전위라고 하지요. 무엇을 위한 전위입니까? 누구에 대한 레지스 탕습니 까? 정립(定立)이 없는 반(反)정립. 우리 예술 풍토가 그래요. 이건 이국 취미치고는 가장 나 쁜 것이죠. 이국 취미는 그 땅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지 않아요. 그 땅에 가보고 싶다는 것. 그 예술을 생산한 풍토와 인간에 대한 노스탤지어. 그래서 미국이나 불란서에 갔다 온 사람들이 어떻게 했나요. 한국 사람으로서 자기 주체(主體)를 반성한 사람보다도, 그쪽의 시민권을 얻은 데 만족한 사 람이 더 많은 게 사실 아닙니까? 외국서 돌아온 예술 가들은 미국 문학의, 불란서 문학의 선전원 자 격으로 돌아온 것이지 한국 문학에 대한 사 랑과 봉사를 마음먹고 돌아온 건 아니죠.
춘향이는 어차피 파마를 할 것이고 자동차를 타고, 끝내 는 재즈에 춤추고, 급기야 이몽룡과의 사랑에도 권태에서 오는 저 무서운 사랑의 파국을 겪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흐름입니다. 발상의 고삐야 누가 가졌든 게임의 승패는 분 명해요. 이런 경 우 사람은 두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지 않겠어요? 방관하는 것과 돈키호 테가 되는 것.
… 이 당구라는 놀음은 인간의 행동을 닮았다. 정작 때리고 싶은 것은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저렇게 굴절을 한 다음에 목표를 맞힌다. 정글 속에서 먹이를 만나면 사자는 서슴없이 직선 거리를 택해서 목적을 이룬다. 사람은 다르다. 빙빙 돌아서 한눈을 팔고 방관하는 체하다가 슬쩍 목표를 쥐는 것 이다. 그는 모서리에 바싹 붙은 공을 끌어서 꽤 무리한 공을 때렸다. 맞지 않았다. 그는 돌 아가서 다시 겨냥해서 때렸다. 딱.
서양 사람들은 시지프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시지프가 아니다. 우리는 ‘시지프의 엉덩이 밀기꾼’쯤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괴로움은 시지프의 고결한 고통과 수난의 얼굴을 닮지 않 고, 늘 어리둥절하고, 환장할 것 같고, 겸연쩍고, 쑥스럽고, 데데하고, 엉거주춤한 것이다.
사람만이 섹스를 놀이에까지 높였다. 동물들은 생리적 운동으로 그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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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점에서 준의 마음을 끄는 것은 카프카였다. 대상을 완전히 분해하지는 않으면서 거기서 ‘뜻’을 탈색해 버리는 방법. 그러는 경우에는 리얼리즘의 모든 규칙을 지키면서 일상성과는 완전히 거꾸로 된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카프카의 세계는 전통과 질서에 대한 질문이다. 그가 처음 카프카를 읽었을 때의 놀라움. 문학이 이런 세계를 불러내는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신(神)을 잃은 세계에서의 인간의 고독. 권위를 잃은 세계의 뜻없음. 꿈의 세계. 분해과정에 있는 부르주아 정신의 말기 증상. 그것은 얼마든지 번역이 가능한 것이었다. 문학으로서 가능한 상징의 끝은 카프카일 것이다. 그 이상 더 밀고 나가면 그러한 극단을 가누기에는 언어가 견디지 못한다. 돌을 돌이라 하고 꽃을 꽃이라 하면서 돌이 아니게 하고 꽃이 아니게 하는 것이 카프카의 소설이다. 초현실주의라 하더라도 카프카의 그것은 이미지 서로간에 혼융과 교체를 허용하는 비고체(非固體)적인 경향과는 다르다. 카프카의 세계에서 의자는 의자다. 그러나 그 경우의 의자는 스핑크스처럼 알 수 없는 수수께끼다. 그의 소설을 이루는 낱낱의 장면에는 아무 비약이 없다. 그러나 그 결합에, 그리고 소설 전체가 한마디 수수께끼인 것이다. 이것은 놀랍고 비상한 ‘물음’의 방법이다. 정통적인 소설도 기실에 있어서는 수수께끼다. 가령 우리가 발자크의 그 세밀화처럼 분명한 소설에서 과연 어떤 ‘절대’를 알았다는 것일까. 그렇게 자상스럽게 설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려진 한에 있어서의 소설의 내용은 언어의 저쪽에 있는 어떤 것, 가령 그것을 ‘삶’이라 한다면 그 삶을 가리키고 있는 인덱스에 지나지 않는다. 언어의 이 같은 상징성 때문에 번역이 가능할 뿐더러 다른 예술의 장르와의 공명현상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정통적인 소설의 경우는, 이렇게 방법적으로 독자 자신이 ‘물음’의 소재로 쓴다면 충분한 스핑크스의 얼굴이 되지만, 그것이 씌어졌을 때 작가 자신의 자각적인 ‘물음’의 자리에서 씌어진 것은 아니다. 전통 예술과 전위의 차는 근본적으로는 그 생산자의 자세로 결정되는 것이지 표면적인 수법, 소재에서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하늘 아래 새것은 없다. 다만 새 시점(視點)이 있을 뿐이다. 아무튼 독고준에게 카프카는 그처럼 위대한 선배였다. 그러나 막상 그의 방법을 따르려고 할 때 그는 다시 한번 놀랐다. 왜? 카프카는 한 사람으로 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카프카와 같은 세계는 엄격한 선취득권(先取得權)이 인정돼야 할 세계였다. 설령 카프카보다 더 카프카적인 소설을 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사족(蛇足)이다. 그런 뜻에서 모든 천재는 기독교 신학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와 같다. 그것은 한 번만 있는 일. 역사에 절대(絶對)가 끼어든 ‘한 번만의’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한 번만 온 것이다. 그로써 일은 끝났다. 신약 성경의 주인공의 이름은 정해졌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와 똑같은 일을 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도(信徒)의 이름을 얻을 뿐 주(主)는 될 수 없다. 되풀이가 무의미한 사건. 역사는 이런 행운아들의 이름을 기록하지만, 숱한 에피고넨들의 이름은 생략해 버린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그녀의 가장 큰 재산일 그 믿음이 두 사람 사이에 막아 설 것이다. 그는 그녀에게 자기 같은 사람이 되라고 권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자신이 그를 구원해 주겠다고 나선다면? 그것은 있을 법한 일이었다. ‘진리를 깨쳐’ 주기를 원한다면? 그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정을 무슨 재주로 알려 줄 것인가? 김순임 같은 여자는 김학과 같은 종류다. 어느 한 군데가 막힌 사람을 타이르느니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 그들은 특별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 아름다움과 착함을 남겨 놓기 위해 생긴 그런 사람들이다. 만일 김순임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어린애 손에서 사과를 뺏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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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경우 이것은 정통이다. 서양에서는 같은 내용이 전위가 된다. 그는 본문을 읽어 보았다. 거기에 필자는 쓰고 있었다. 피카소, 브라크, 블라맹크, 마티스가 니그로 예술에서 색채와 구성과 환상을 얻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현대 화가는 어떤 그림을 그릴까. 반대로 그들은 다빈치와 루벤스에게서 색채와 원근법과 환상을 받고 있을까. 희극이다. 그러나 약간은 슬픈 희극이다. 그러나 독고준이 더 씁쓸하게 생각한 것은, 한국 사람인 자기가 서양 미술사의 시점에서 이 이방의 미술품에 놀라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서양 사람처럼. 이러한 기묘한 인식의 우회(迂廻). 그것은 물론 나의 책임이 아니다. 몇 세기 전에 서양 사람들이 무슨 발광이 나서 아프리카에 갔던 김에 그곳의 미술품을 갖다가 박물관에 벌여 놓고 그것을 피카소나 누구가 보았다는 것은 내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자에 의하면, 이처럼 귀중한 아프리카의 민족 예술이 근래에 와서는 씨가 마르게 되어 있다고 한다. 오늘날 이 예술은 구미 각국에서 오는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지는데, 한결같이 거친 솜씨여서, 살아 있는 아름다움을 볼 수가 없다. 이 조각은 무덤에 놓는 것과 종교 의식에 쓰이는 탈 같은 것으로서, 원래 순수한 감상을 위해 제작된 것은 아니라 한다. 구라파의 문명이 들어온 이후로 토착 종교와 옛날 관습이 점점 사라져 가는데 따라서 이들 조각의 원래의 쓸 데는 줄어 가기 때문에, 공장(工匠)들은 스베니르 숍을 위해 제작하지만 그런 작품은 거의 날림이어서 보잘것이 없다. 구라파식인 유화(油畵)를 하는 아프리카인에게 전통의 계승을 권고하면, 그들은 모욕을 느낀다. 자연히 기왕에 생산된 작품을 보존하는 것이 급한 일인데, 사방에 흩어져 있고 정작 신생 아프리카가 미술관을 차리자면 외국에서 향토의 작품을 사들여야 하는 입장에 놓여 있다. 운운.
그리고 아프리카인이라는 것과 한국인이라는 데는 무슨 차이가 없다. 다를 것 없는 원주민이다. 옐로 니그로. 그것이 우리들의 초상이다. 우리들더러 민속 예술이자 인류의 문화 유산인 배뱅이굿이나 무당 푸닥거리를, 그리고 역사 철학으로서의 정감록과 개인 철학인 토정비결을 문리과 대학의 정규 과목으로 채택하라고 권하는 서양 사람이 곧 나설 것이다. 옐로 니그로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 우리들이 사실은 해야 할 일이니까. 사실 예호바가 역사의 터줏대감이라는 것과, 정도령이 역사의 텃줏대감이라는 데는 별반 차이가 있을 리 없다. 다만 우리 것은 예대로 변증법적이 아니고 잡담 제하고 아닌밤중에 홍두깨 식이다. 즉 ‘멋’있다. 아니 원래 계시란 아닌밤중에 홍두깨 식이게 마련이 아닌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원주민이기를 거부하자면. 기린이 되지 말자면. 보호 구역의 주민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은가. 『춘향전』이 승리할 가망은 없다. 그렇다고 남의 다리를 긁을 것인가. 아니. 훌륭한 서양 사람은 남의 나라의 자연 자원까지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야말로 미래의 인간. 세계 시민의 본보기다. 그러나. 그것은 정복자가 가지는 여유다.
우리나라가 동양의 스위스가 된 다음에, 만일 내가 실연(失戀)한다면? 동양의 무릉도원이 내게 무슨 소용인가. 그렇다.
혁명가가 만일 실연한다면? 그의 정부가 그에게 무슨 소용인가.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랴? 이 시대는 천하를 구해야 영혼도 구할 수 있느니라? 이 말 속에는 어딘지 수상한 데가 있다. 천하를 구한다는 건, 우리도 빨리 서양 사람이 되는 게 구원이다? 그리고 우리는 서양 사람도 될 수 없다. 우리가 서양이 됐을 때는 서양은 다른 것이 돼 있으리라. 또 그 꼴이다. 그런 속임수에 자꾸 따라갈 게 아니라 주저앉자. 나만이라도. 그리고 전혀 다른 해결을 생각해 보자. 한없이 계속될 이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경주를 단번에 역전시킬 궁리를 하자. 그러니까 거북이는 기를 쓰고 따라갈 것이 아니라 먼저 주저앉아라. 어떤 거북이는 따라가게 버려두자. 김학이네처럼. 어떤 거북이는 주저앉아서 궁리를 하게 하라. 나처럼. 그러니까 시끄럽게 왜 뛰지 않느냐고 흘기지 말라. 장사는 긴 목이다. 누가 앞설지 뉘라서 알리요. 앞서지 않아도 좋다. 내가 안 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누워 있다. 나는 뛰지 않는다. 나는 농촌 계몽도 안 하고 사회 조사도 안 한다 살여울이 망하는 것보다 내가 망하는 것이 더 아프니까. 살여울이 망하는 것은 너도 망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나는 망할망정 살여울의 주민은 망하지 않는다. 적어도 앞으로 올 세계에서는. 그리고 살여울은 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김학이 같은 사람들이 한사코 지킬 테니까. 나의 무대는 그 다음이다. 나는 회피하는 것인가. 그렇다. 회피하는 것이다. 정치의 악을 ‘에고의 사랑’로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을 나는 거부한다. 그것은 ‘시간’만이 해결할 수 있다. 시간은 ‘역사의 사랑’이기 때문에. 에고의 사랑은 다만 에고에게 바쳐라. 자기의 에고이든 남의 에고이든. 국가나 부족이나 정치나 역사에게 에고의 사랑을 바칠 수 있다는 거짓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하나의 에고는 다만 하나의 에고만을 사랑할 수 있다. 이탈리아는 나의 애인이라고 말한 변태성욕자에게 동티 있을진저. 가면을 쓴 일부다처주의자에게 화 있도다. 인간은 한 사람의 인간밖에 사랑할 수 없다. 한 사람 이상의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자─그것은 신뿐이다. 그런데 신은 죽었다. 한 사람 이상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상황─그것은 가족뿐이다. 그런데 내게는 가족은 없다. 그러니까 나는 자유다. 제기랄.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구나.
자존심의 한 조각도 없는 사대주의. 사람은 정치 속에서 살고 그 정치가 남북을 통틀어 남의 다리 긁는 희극일진대, 그 속에 사는 개인은 어떻게 손발을 놀려야 하는가. 여기서 국가네 민족이네를 생각한다는 것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고기를 잡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면. 아니. 실수할 뻔했구나. 마치 애국자가 되고 싶은데 시세 탓으로 못 된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것처럼. 아니다. 애국자는 싫다. 무슨 수를 쓰든지 애국자가 되는 길만은 피해야 한다. 최소한 애국자는 되지 말아야 한다. 애국자가 된다는 건 사냥의 몰이꾼이 되는 일이니까. 사냥꾼이 못 돼서? 아니. 사냥, 그것을 별로 탐탁해하지 않으니까.
12
준은 영숙이네 주소를 적어 드렸다.
그렇다 저 여름날 은빛의 새들이 도시를 폭격하던 날 그 부스럼은 움트기 시작했었다 조갯살 속에 끼어든 한 알의 모래처럼 그 여자는 나에게 고칠 수 없는 부스럼을 심어 주었지 도시보다도 폭격보다도 조국보다도 나에게는 더 치명적인 한 알의 모래를 그것을 진주라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게 미화하지 못하는 게 내 병이다 그것은 부스럼이다 살에 파고드는 딴딴한 부스럼이다 곪지도 터지지도 않고 그저 저리고 쑤시는 부스럼이다 이 아픔을 잊기 위하여 나는 이빨을 세우고 먹이를 찾은 것이다. OP에서도 나는 줄곧 그 따분한 공기와 햇볕과 포대경(砲臺鏡) 속의 적(敵)을 짓씹어 봤다. 그러나 실은 나 자신의 살을 파먹고 있었던 것이다. 김순임을 김학을 현호성을 물어뜯었다고 생각한 것도 착각이었다 내 살을 파먹고 있었을 뿐이다 어느 구석엔가 잘못이 있었다 이유정은?
준은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저만치 떨어져 앉은 그녀는 그 사이 깜빡 어두워진 방 안에서 그저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사람 모양을 한 그 두툼한 그림자가 그 순간 희미한 후광을 둘렀다. 저 부드러운 그림자를. 저 그림자를.
바위에 달려드는 파도처럼 소리치면서 그리로 달려가는 마음. 처음 파도는 단단히 다문 하얀 치열에 부딪혀 바스러지고 지금 다시 한번 마음은 솟구쳐 오른다.
우리 시대의 모험은 가까울수록 진짜다? 아니 어느 시대나 그렇지 않았을까. 어느 시대나.
13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리스도가 나하구 무슨 상관이야 드라큘라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야 다른 사람들의 룰을 따라 육갑하자는 거야? 번역극에 출연하고 있었구나 아뿔싸 또 실수할 뻔했구나.
그는 깔깔 웃었다. 그리고 아주 유쾌해졌다. 돈키호테는되지않겠다는것선교사부인을흉내내는원주민아가씨는되지말자는것이내결심이아니었나─빌어먹을이놈의세상을살자면함정투성이구나그런데나는그걸할뻔했으니천만의말씀이다드라마여안녕난그런각본에끼지않는다. 함정에서 벗어난 짐승처럼 가볍고 신나는 동작으로 그는 옷을 벗고 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뛰어오를 때 쿵 하고 소리를 냈다. 몇 번 뒤채다가 조용해졌다. 어느새 가볍게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아주 태평한 숨소리였다.
14
그리고…… 부질없는 가정을 하다보니 슬그머니 비감해진다. 나는 여기저기 다니며 물어 보았으나 한결같은 얘기는 몸 성히 공부 잘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말뿐이었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학생이구나…….
“좋은 일이야. 그러니까 그건 혁명이 아니야. 시간 속에서 작업하는 것이지. 성실해. 그러나 혁명이 아니고 개혁인 바에야 그와 같은 참여는 다른 사람에게 강요되어서는 안 돼. 혁명처럼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고 이미 주어진 자리 속에서 노력한다는 경우에는, 길은 두 갈래가 아니고 무수히 많다는 거야. 안 그래? 행동력이 약한 골샌님이 여름 한 달을 시골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치는 것과 한 달을 자기 연구에 바치는 것과,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따진다면 우열을 가리기는 힘든 일이야. 우리는 자네 말처럼 학생에 지나지 않아. 정치적으로 넓은 의미에서 말이지,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야. 외국 압제자들을 상대로 하는 경우에는 학생의 입장은 훨씬 간단했어. 그러나 지금 자기 나라를 가졌다는 조건에서는 아주 불리해. 그러니 시간만이 해결한다는 거야. 자네들이 내각을 만들 때 잘 하는 수밖에. 그때 잘 하자면 지금 착실히 공부해 둬야 할 게 아냐? 몸 성히 공부 잘 해서 훌륭한 사람 되라는 말이 맞지 뭐야?”
“그러니까 싫어. 이것 봐. 혁명은 새 신화(神話)를 실천하는 거 아니야? 지금 당장에 민주주의를 대신할 새 신화란 걸 생각할 수 있나? 없단 말야. 그렇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라 강제적인 정권 교체, 즉 사람을 바꾸는 것밖에 안 되는 건데, 난 새 신앙을 제시하지 않는 사람의 교체는 위험스런 일이라고 봐. 이 자네 글에 있는 상황과는 달라. 자네 말처럼 상해의 권위를 장한다는 신화적인 후광이 있는 인물이나 집단인 경우라면 몰라도 지금 우리 사회에 어디 그런 인물이나 집단이 남아 있나? 다 잡아먹었거나 멍이 들고 말지 않았나? 그렇다고 난 현상을 바꾸는 길이 하나도 없다는 건 아니야.”
준은 아래를 보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학은 김순임의 얼굴을 문뜩 떠올리며 또 농을 했다.
“행복한 인간은 딴은 혁명에 흥미가 없는 게 당연하지…….”
신에게도 악마에게도 붙지 않는다는. 그러나 나는 배신할 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나에게는 드라마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불가능한 것을 뛰어넘는 것, 그것이 혁명이다? 불가능한 것을?
준은 벌떡 일어나 마루에 내려섰다. 그리고 방 안을 걸어다니면서 자기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불가능한 것을? 그렇다. 내가 신이 되는 것. 그 길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번역극이 아닌가? 거짓말이다. 유다나 드라큘라의 이름이 아니고 너의 이름으로 하라. 파우스트를 끌어 대지 말고 너 독고준의 이름으로 서명하라. 너의 이름을 회피하고 가명을 쓰려는 것, 그것이 네가 겁보인 증거다. 남의 이름으로는 계약하지 않겠다는 깨끗한 체하는 수작은 모험을 회피하자는 심보다. 아니 나는 모험을 했다. 노동당원을 협박해서 돈을 뺏었다. 현호성에게는 내가 고통일 것이다. 나는 그에게서 돈을 뺏는 것으로 만족이다. 신파는 싫다. 내 속에서 자라 온 불치의 부스럼을 어루만지며 나는 간소한 동굴에서 쉬기를 원했다. 거짓말이다. 현호성은 너를 베스만큼으로밖에는 여기지 않는다. 너와는 상대를 안 해주고 있지 않은가. 뼈다귀나 던져 주고 있을 뿐이다. 비겁한 너는 주인의 식탁은 감히 쳐다보지 않았다. 너는 형법을 참조하면서 도둑질을 하는 악당처럼 치사한 놈이다. 아니다, 아니다.
술만이 아니에요. 그리고. 인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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